2012/02/13 13:28
벌써 이틀 전의 일이다. 

내가 전함 테크를 찍고 생산준비를 하느라 제 2 나선팔 속 쥐구멍만한 행성 하나만을 관리할 때다. 

전함을 사러 모처럼 경매장으로 갔는데, 그다지 마음에 드는 전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들른 김에 순양함이나 사가야겠다라고 생각하던 참에 마침 순양함을 판다는 노인이 딱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다 싶어 자세히 보니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네가 순양함을 가득 쌓아놓고 앉아있었다. 

어지간히도 생산력이 좋은 노인네였나보다.

순양함이나 하나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한 대씩은 안 파는 것 같았다.
 
한 대만 팔아 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순양함 한 대 가지고 어디 얼마나 털어먹겠소? 정 비싸거든 경매장의 구축함이나 사러가시오."



듣자하니 노인의 심뽀에 화가 났지만, 순양함은 특성상 여러 사람들이 쓰던 것을 쓰면 좋지 않기에, 납득하기로 하고 그저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경매장에 순양함을 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올리는 것 같더니, 날이 저물도록 순양함을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나에게 사소한 버릇이나 습관등을 물으며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다듬고 있다.

인제 그 정도면 충분히 구축함을 쳐바를 수 있으니 됐다고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 이다. 

하루종일 행성 점령 걱정에 에너지도 부족하여 빨리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초초하고 짜증나서 가격도 안보고 대충 사버릴 지경이다.



"더 다듬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팔아라." 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가공할 만큼 가공해야 순양함이라 할 수 있지, 무턱대고 싸게 판다고 순양함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직접 공격보낼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쓴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지금 빨리 점령해야 한다니까."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라며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는 없고, 어차피 망한 점령, 지금 돌아가서 막타치는걸 생각하니 마뜩찮아, 될대로 되라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요 며칠간 머릿속에서 점령한 행성,  못 점령한 행성 죄다 짜내었더니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자포자기한 심정도 있었다.


"그럼, 어디 마음대로 만들어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주포가 거칠어지고 방어막이 안 좋아진다니까. 순양함은 제대로 만들어야지. 만들다가 놓아버리면 쓰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만들던 것을 숫제 조선소에서 태연스레 바라보고 만지작 거리고 있지 않은가. 

나도 고만 지쳐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또 노인은 몸을 구부려 다듬기 시작한다. 

저러다가 순양함이 다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몽키스패너를 들고 유심히 바라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사실 다 돼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순양함이다.

경매장을 나서던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경매를 해가지고서야 장사가 개판일 수 밖에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꼴에 폼을 잡는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문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기지개를 펴면서 탐험 패널에 측은하게 쪼그린다. 

그 앉아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홀아비같아 보이고 쭈글한 눈매와 콧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것이다.

본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노인이 준 순양함으로 공격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의 인상과 대화에서 유추해낸 여러 함대 조형을 노인의 솜씨로 유려하게 되살린 순양함을 보는 나도 그 재미에 푹 빠졌다. 

곧 여러 버려진 행성에 순양함을 쑤셔넣었는데, 그곳에 자원을 제대로 털어올 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몇일 후 몇몇 보고가 왔다. 

순양함이 참 막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내가 직접 만들었던 다른 순양함들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보고를 좀 더 자세히 보니, 순양함이 너무 길거나 무장이 많으면 저 함선이 전함인가 싶어 의심이 가고, 너무 짧고 직선적이면 구축함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정말 필요한 무장과, 함선의 길이를 과학적으로 빛어낸 멋들어진 순양함은 처음이라며 보고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몇일이 지나지 않아 마음에 드는 행성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순양함은 좋은 미사일을 골라 무기로 만든 후에, 거친 장갑의 궤적을 섬세하게 다듬은 후, 

속도감을 거스르지 않을 단정함과 자신감으로 마무리 해 통치자에게 최적의 쾌감을 제공한다. 

이것을 '함대로 후린다'라고 한다. 

그런 실력으로 순양함을 만들게 되면 보고서에는 


'처음에는 담담하지만, 보다보면 순양함에 대한 호의가 어느새 온 몸을 휘감아 행성 방어막을 절로 통과시키며 약탈에서도 가산점을 주는' 순서가 고스란히 올라오게 된다.


그러나 요새의 순양함은 엉터리 무장을 달아두는데다 장갑의 궤적들도 설계도에서 대충 훑어본 것들로 달아놓고 끝이다. 

설계도에서 본 무장과 장갑들이라 얼핏 보기에는 더 근사해보이지만, 막상 공격 보내보면 무척 엉성하고, 보고서에서도 쉬이 들통나는데다 약탈에도 악영향을 미쳐 정복 계획이 엉망이 된다. 

하지만 무한 약탈의 시대인 요새에 이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의 순양함을 세련되게 만들어주는 함선의 장인이 있을 턱이 없다.

전함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전함을 만들면 얼마, 강함모는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은하 중심에서 온 것들은 받는데 세 배 이상 오래 걸린다. 

은하 중심에서 온 것이란, 좋은 통치자를 만나 많은 수정, 많은 자원으로 대량으로 생산하며, 조선소 등급이 오등급이라 만드는 시간까지 빠르고 값싸니 제국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가격들을 보고 사는 것이다. 

크레딧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경매에서 유찰되는데 가격이니 뭐니 해도 도통 감을 잡을 수도 없고, 은하 중심이라고 하여 3배나 값을 더 줄 사람도 없다.

옛날 통치자들은 경매는 경매요, 생산은 꿈이지만, 순양함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훌륭한 함선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인생을 쏟아냈다. 


이 순양함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경매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통치자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서버에서 어떻게 아름다우면서도 강력한 순양함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 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 크레딧에 닥포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경매장으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쪽 김녹차의 행성들을 바라다보았다. 

은하 끝자락까지 날아갈 듯한 워프게이트 끝에서 슈퍼지구가 성장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슈퍼지구를 보고 있었구나. 

미사일 하나하나를 새기듯 순양함을 만들다가 유연히 워프게이트 끝의 슈퍼지구를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본 행성에 들어갔더니 부관이 순양함을 양산하고 있었다. 

전에 순양함을 구매하며 고뇌하던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순양함을 사본 지도, 본 지도 참 오래다. 

요사이는 뉴비 구역에서도 순양함을 돌리는 풍경을 볼 수 없다 한다. 

애수를 자아내던 그 풍경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이틀 전, 순양함 만들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