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17 15:42

깨어난 굼이 최초로 발견한 사실은 바로 주변이 그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진정한 어둠으로 가득차있다는 사실이였다. 밤이 낮에 의해 정복됬던 때가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였는만큼, 그가 살아왔던 모든 곳은 시간에 관계 없이 항상 빛으로 가득차 있었고, 가장 어두운 곳도 그 사실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주변에는 빛이라고는, 진정한 의미로 한점도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굼은 똑똑한 사내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사는 행성은 반년간 낮만 계속되고, 나머지 반년은 밤만 계속되는 곳이라는 사실과, 현재는 낮만 계속되는 주간이기에 그 어디라도 이렇게 어두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눈을 더듬어보니 깔끔한 붕대가 눈 위의 모두를 휘휘 감고있기까지 했다. 이 사실들은 서로 조합 되 굼에게 믿기 힘든 진실을 전해주었다.


바로 자신이 장님이 되었다는 진실이였다.


"말도 안돼."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였다. 애써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두고 있었던 며칠, 혹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이 장님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기폭제로 무자비하게 터져나왔기 때문이였다. 그때의 그 세상 모두가 불타는듯한 위험의 냄새, 압도적이기에 오히려 조용했던 폭력의 소리, 온 피부가 바늘로 찔리는듯한 따가운 경고의 고통. 방황하던 자신을 따스하게 받아들여줬던, 하지만 이제는 사라진 은하경매장. 그리고 그 안에서 죽었을 친구, 동료, 상관, 애인, 모두들.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충격적이였기에 잊으려 했던 기억들이 준비되지 않은 굼의 머릿속을 잔악하게 난자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그 모두가 너무도 괴로웠기에 굼은 몸부림을 쳤다. 심장과 영혼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쥐어짜서 내지르는듯한 비명을 지르며 막막한 어둠속에서 만져지는 모두를 부수고 던지고 발로 찼다. 그러다 실수로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지자 누군가 자신을 덮쳐서 죽이려 한다는, 그리고 자신은 반항할 수도 없다는 끝없는 공포에 휩싸여 공포와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굼이 그렇게 절망에 차있을 무렵, 굼을 그곳까지 대려왔던 흐로펩은 모든 물자를 한곳에 모으고 있었다. 흐로펩이 굼을 대리고 마침내 도망쳐온 곳은 행성파괴함에 의해서 사라진 번화가의 지하에 위치한 튼튼한 벙커였는대, 어느 부호가 이런 때에 대비해 짓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손상을 입어 드러난 틈으로 들어간 후 안을 탐사해본 결과 정작부호는 도망치지 못했는지 아무도 없었고, 근처에 이곳을 노릴 생존자들도 없어보였기에 흐로펩은 이곳의 드러난 부위를 가려서 이곳에서 살기로 결정하였었다. 흐로펩은 굼이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곳에 숨어있었던 누군가에게 기습당해 비명을 내지른 것으로 판단해서 비명소리를 듣자마자 들고 있던 물자를 바닥에 내팽겨친 후, 안에서 발견한 총을 든채 재빨리 굼을 눕혀뒀던 거주지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흐로펩이 발견한 것은 안전하고 호화로웠던 방의 파괴된 모습과, 혼자서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고 있는 굼의 모습이였다. 흐로펩은 굼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소대중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스스로 머리를 날려 자살했던 한 병사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흐로펩은 그 병사가 기억날 때마다 두들겨 패서라도 죽을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곤 했다. 그랬기에, 흐로펩은 총을 바닥에 툭 내던진 후 주먹을 꽉 쥐더니 굼의 멱살을 한손으로 쥐어잡아 위로 번쩍 올린 후 정신이 번쩍 들도록 얼굴을 후려갈겼다.


단련을 통해 살인무기로 변한 해병 전역자의 주먹은 무시무시했다. 한대 한대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쥐어박혔고, 한대 한대가 맞는 사람의 정신을 어디론가 날려 보낼 정도로 강력했다. 굼은 갑자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서 들여올려진 후, 어둠속에서 날아오는 보이지 않는 살인적인 주먹에 얻어맞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자신은 죽을 것만 같았다. 점점 굼의 정신이 아득해져가는 그때, 문득 한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행성을 습격한 함대는 당연하지만 누군가의 통솔을 받았었을 것이였다. 그리고 그 통솔자의 위에는 그 통솔자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누군가가 있을 것이였고, 당연하지만 그 누군가는 지금 좌절하는 자신과는 달리 호위도식하며 사랑하는 자들 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였다. 굼은 이것이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을 이렇게 절망하게 만든 자는 오히려 행복할 수가 있는 것이지? 그자도 나와 같은 좌절을, 아니 나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좌절을 맛봐야 되지 않는가? 굼은 분노가 주먹을 꽉쥐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굼의 마음속에서 불이 타올랐다. 그 검고 붉은 불은 굼에게 속삭였다. 너에게 절망을 맛보게 한 누군가에게도 똑같은 절망을 맛보게 하여라! 그의 행성을 이 행성처럼 불태우고, 그의 함대또한 눈물을 흘리게 하여라! 그가 평생동안 이룬 모든 것이 끝없는 화마로서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하여라! 그자의 인생을 파멸시켜라!


퍽!


굼은 분노로 쥔 주먹을 앞으로 날려 자신을 붙잡고 두들기고 있던 흐로펩의 볼을 후려갈겼다. 흐로펩은 굼이 대충 정신을 차린 것 같자 굼이 누워있던 침대 위로 던진 후 얼얼한 볼을 어루만졌다. 그 후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행히 정신은 차린 것 같군. 나의 전우중 한명이 너와 비슷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봤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많이 아팠다면 사과하도록 하고 휴식을 모두 취하면 그때부터 치료를 시작할테니 침대 옆에 설치된 벨을 누르도록. 참고로, 내 이름은 흐로펩이니, 날 부를 일이 있으면 그렇게 부르면 된다."


굼은 더 이상 좌절감에 휩싸여 있지 않았다. 모든 나약한 감정은 너무도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에 의해서 재가 되었기 때문이였다. 대신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이글거리는 화염이 자리잡았다. 그 화염은 누군가의 인생을 자신의 것처럼 아작내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으며 기계의 엔진처럼 굼의 몸에 무한한 활력을 불러다줄 무언가였다. 굼은 어질거리는 정신으로 자신을 후려갈겼던 누군가가 적의에 그런 것은 아니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주먹을 꽉 쥔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굼은 이름모를 누군가의 거대한 제국을 벽돌 하나 남기지 않고 불태우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