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5 20:43
사람의 역사가 노래로 불리며 환상과 몽환이 태양아래 대지를 거닐던 시절, 동방 그 너머 미지의 대륙으로부터 온 모랫빛 터번의 사막 대상인들이, 비단과 향신료 같은 진귀한 보물을 싣고 동방의 제국과 동남방의 제국과 서방의 제국을 잇던 동방 대사막, 드높은 산 위의 순결한 만년설 곁에, 만인이 보고서 그 황량함과 광활함에 더 없이 감탄하고, 다시 만인이 그 아름다움 속에 은밀히 숨겨진 냉혹한 죽음 속에 덧없이 쓰러져가는, 그런 모래사막이 함께 존재하는 곳, 아름답지만 아름다운만큼 무심하고, 다시 무심한 만큼 사막 위를 거니는 낙타와 대상인들의 생사에 관심이 없으며, 관심이 없기에 너무도 간단히 그들의 생사를 결정지어 모래바람 속에 하얗게 탈색되어가는 수천 년 묵은 뼈 무더기로 만들어버리는 곳, 그곳의 모래와 만년설과 바위와 소금호수,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위험 모두에 감탄하며 경이 속에서 살아가는 사막사람들까지, 그 모두를 스스로의 권역이자 권속이자 집이라 삼아 살아가는 잠룡이 한명 있었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모래사막 깊이 가장 깊숙하고도 은밀한 사막의 심장 속으로 파고들어가 스스로만을 위한 거처를 지었고, 그곳에 스스로의 지혜와 보물들을 인류의 역사가 기나길고 방대한 만큼이나 모았다. 보물과 지혜가 한 곳에 모이면 언제나 욕심과 열망과 야망에 사로잡혀 몰려드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 동방 대사막에 무역이 번성해 가장 가난한 자의 손아귀에서도 황금이 바닷물처럼 흘러내리지만, 손에 쥐고 있는 황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이들이 이 땅 위에 많고도 넘쳐흐르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비쩍 마른 거지의 손에서도 마지막 남은 한모금의 물병을 빼앗을 자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 동방 대사막의 잠룡의 거처를 찾아내 약탈하고자 온 사막을 뒤졌다.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지며 온갖 아집과 이기심을 보였고 그 안에서 배신과 또 다른 배신이 음험한 검은 장미처럼 덧없이 피고 덧없이 흩어졌다. 스스로의 살이 아니라고 어찌나 간단하게 살을 베는지, 스스로의 피가 아니라 어찌나 간단하게 피를 흘리는지.
 
그렇게 모여들어 물고 뜯는 짐승들 중에 세상 사람들 중 가장 지혜롭고 강대하다는 서방바다의 주술사 있었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 숨겨둔 지혜를 찾아내고자 서방바다로부터 머나먼 길을 걸어온 주술사는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 숨겨둔 금은보화를 욕망하는 사막도시의 거상과 힘을 합쳐 함께 사막을 찾아보고 또 찾아봤다. 하지만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잠룡의 거처는 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않자 사막도시의 거상은 이 잠룡의 소문이라는 것이 헛소문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이 잠룡의 소문이 헛소문이라면, 대신 더 이득이 될 만한 일에 시간과 인력을 투자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 그래서 사막도시의 거상은 서방바다의 주술사가 가지고 있는 서방바다의 보석을 강탈하기 위해 서방바다의 주술사를 배신해 습격했다. 서방바다의 보석을 손에 쥔 자는 서방바다의 파도와 폭풍우를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다는 소문이니 서방의 제국에 비싸게 팔아넘길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순순히 값진 보물을 빼앗기는 대신, 서방바다의 주술사는 원통함과 비통함에 검고도 붉은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서방바다의 보석을 깨트리고 마지막 저주를 사막도시의 거상에게 걸었다. '네놈의 가장 값진 보석은 나흘째의 태양을 마음껏 보겠지만 나흘째의 태양이 마지막으로 저무는 순간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방식으로 죽음의 쓰라린 구렁텅이로 빠져들을 것이다. 오로지 네 번의 태양만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은 매번 보는 태양이 더욱 더 귀중히 보이도록 만들 것이지만, 귀중히 보이는 만큼 아쉬운 마음도 커질 것이요, 결국 마지막 태양이 저무는 모습이 세상 무엇보다도 고통스럽고 처절한 것으로 보이도록 할 것이다.' 사막도시의 거상이 가진 가장 값진 보석은 막 성년으로 피어오른 외동딸, 사막도시의 모래장미였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그녀에게 끔찍한 저주가 걸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깊은 비통감에 빠져들었다. 동방 대사막 곳곳을 누비며, 사막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수백 년간의 모험, 음모와 사랑을 나누었던 과거의 영웅과 악당들처럼, 사막도시의 모래장미 역시 그녀만의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고 했었지만, 채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이야기는 겨우 나흘만 남았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깨닫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녀의 이야기는 나흘만 남았을지언정 그 나흘은 길고도 긴 나흘이 될 것이란 것 이였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다른 영웅과 악당들의 이야기가 사람과 모래바람으로부터 잊히고 오로지 말라붙은 점토판에만 기록되어질 미래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만인으로부터 불릴 것이라는 것 이였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저주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지혜롭다는 사내들을 만나며 첫째 날을 보냈다. 사막도시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사내들 중 그 누구도 서방바다의 주술사가 죽어가며 건 마지막 저주를 푸는 방법을 몰랐으니 첫째 날을 덧없이 보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포기하지 않고 직접 사막도시의 쑤크 알-마디나(سوق المدينة)를 누비며 온갖 고서적 속에 숨겨진 지혜를 발굴해내며 둘째 날을 보냈다.
 
동방의 무역로와 서방의 무역로가 만나는 사막도시에는 세계 그 어느 시장보다도 더 번창하는 쑤크, 즉 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쑤크 알-마디나로 안에는 자그마한 쑤크 골목들이 수없이 자리 잡고 있어 그중 고서적은 쑤크 알라꾸뗍(سوق الكتاب)이라는 곳에서 주로 거래되었다. 그래서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온갖 향신료, 염료, 비단과 금은보화를 지나 쑤크 알라꾸뎁의 퀴퀴한 골목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고서적상이란 고서적상은 모조리 찾아가서 온갖 것들을 뒤집어엎고 나왔다. 하지만 역시나, 쑤크 알라꾸뎁에 자리 잡은 수십 개의 고서적상중 그 누구도 서방바다의 주술사가 죽어가며 건 마지막 저주를 푸는 방법을 담고 있는 고서적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렇게 둘째 날의 태양이 덧없이 저물었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다급해졌다. 나흘의 시간 중 이틀을 덧없이 흘려보냈으니 이제 살아 사막의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는 나날이 겨우 이틀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 더 있겠는가. 사막도시의 거상은 사막도시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사내였으며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그런 향신료와 비단의 거인이 가장 아끼고 어여뻐하는 외동딸 이였지만, 그렇게 산처럼 쌓여있는 향신료와 비단도, 바다처럼 흘러넘치는 황금과 권력도, 세상 만인이 갈망해 못지않을 온갖 귀중하고 진귀한 것들도 사막도시의 모래장미에게 허용된 나흘이란 시간에 단 하루의 시간도 더해줄 수 없었다.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어봤자 나흘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그 진귀한 보물이 무슨 가치일까.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태어나 처음 맞이해본 역경에 좌절해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사흘째의 태양이 저물고,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두려워하던 나흘째의 태양이 결국 떠올랐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볼 수 있을 마지막 일출 이였다.
 
사막도시 궁전의 첨탑에서 마지막 일출을 바라보며,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깨달았다. 고요하고 신성한 이른 아침의 어둠 속에 어슴푸레 잠긴 광활한 모래바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가장 값진 보석도 감히 흩뿌리지 못할 성스러운 섬광과 함께 태양이 떠오르니,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모래알갱이들, 그 수천만 개, 아니 수억 개, 아니 수십, 수백억 개가 넘게 흩어져있을 그 수많은 모래알갱이들 하나하나 모두가, 어느 황금보다도 황홀한 황금빛으로 불타올라 그 황홀한 황금빛으로 보이지 않는 모닥불을 피웠고 들리지 않는 성가를 부르며 느끼지 못할 축복을 빌었다. 그것은 정녕 그 어느 보물보다도 값진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은 아름다운만큼 쓰라린 고통과 씁쓸함으로 모래장미의 가슴을 찔러왔다. 모래장미는 앞으로 살아 그 광경을 다시 보지 못할 테니까.
 
바로 창밖 성벽 너머에 자리 잡은 광활한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지 못할 순간이 되서야 깨닫는다니, 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쓰라린 깨달음이던가, 그리고 세상 어느 값진 보물보다도 귀중한 광경을, 세상 어느 값진 보물을 바친다 해도 다시 못 볼 지어니, 그 값지다는 보물이 얼마나 허무하며 한낱 모래 한줌보다도 의미가 없던가.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이름 모를 시를 읊었다.
 
옛 땅에서 온 여행자를 만났네.
그가 가로되, '거대한 두 다리 석상이 몸통은 어디 간 채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소. 그 곁, 모래판에,
깨진 두상이 반쯤 묻혀 누워있었는데, 그 찡그린,
주름진 입술엔 냉정한 명령자의 냉소가 감돌고 있었기에,
조각가가 그 지배자의 넋을 잘 읽어냈음을 보여주는 바,
그리하여 그 넋이 주인에 따르던 손과 뛰던 심장을 넘어서,
생명 없는 돌 위에 각인되어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았소이다.
그리고 받침돌에는 이런 말들이 있었으니:
 
"나의 이름은 오지만디우스, 왕중의 왕.
나의 업적을 보라, 뉘 강대하다는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소. 뭉툭히 삭아버린
거대한 폐허, 끝이 없고 황량한,
외로운 첩첩의 모래벌판만이 멀리까지 뻗어 있었소.'
 
쓰라리고, 또 쓰라린 시였다. 낭송이 끝난 첨탑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감히 그 침묵을 깨트리지 못해 그저 가만히 창가에 서 있었다. 하지만 침묵 속에 잠긴 첨탑 꼭대기 방과는 달리, 사막도시의 모래장미 마음속 에는 강렬하고도 뜨거워 들끓는 듯 감정들이 끓어 넘쳤다.
 
처음 떠오른 감정은 분노였다. 어째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다음 떠오른 감정은 고통 이였다. 이 세상에 할 것이 그토록 많고 볼 것 역시 너무나 많으며 만나서 교류하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써나갈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남아있건만, 나는 오늘 저녁 일몰을 마지막으로 이 짧은 인생을 끝내겠구나.
 
그 다음 떠오른 감정은 공포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거리를 확 좁혀 다가온 죽음이 두려웠고, 서두르지 않으며 서서히 다가오지만 언젠가는 턱밑 바로 아래까지 다가와 목숨을 앗아갈 죽음의 느긋한 집요함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결국에는 아무런 소용없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 다음 떠오른 감정은 절망 이였다. 아, 이제 끝났구나. 정말로 끝났구나.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겠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정말로 모두 끝나겠구나.
 
그 다음 떠오른 감정은 무기력감 이였다......
 
하지만 무기력감이 마지막으로 떠오른 감정인 것은 결코 아니였다, 절대 아니였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결코 그녀의 감정이 그녀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아 순순히 그녀의 죽음으로 이끌어가도록 놓아둘만한 인물이 절대 아니였다. 죽음의 그 지독하고도 음험한 냄새가 모래장미의 코를 얼얼하게 만들 정도로 죽음은 그녀 가까이까지 다가왔지만 그녀는 순순히 죽음에게 잡혀갈 생각은 결코 없었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 타오르는 태양같이 이글거리는 붉은머리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그녀의 마음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감정은,
 
갈망 이였다.
 
삶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 삶의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그 아름다움 속에 숨 쉬는 온갖 기회들에 대한 갈망, 그 기회가 거미줄처럼 이어지고 얽히며 만들어지는 사람세계 속 이야기들에 대한 갈망, 그리고 다양한 목적과 과거를 가지고 살아가며 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그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이야기 속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삶에 대한 갈망.
 
그래서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살 것 이였다, 오, 그녀는 기필코 살아남아 이 엿 같은 저주를 비웃을 생각 이였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움직여야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단 일초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의미 있게 사용해야만 했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사막도시의 거상의 낙타 중 가장 튼튼하고 재빠른 낙타를 골라 최소한의 짐만 챙겨 올라탄 다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막 속으로 달려 나갔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그녀 일생 최대이자 최후의 도박을 해 볼 생각 이였다. 이 도박이 성공한다면 그녀는 살거나, 최소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요, 실패한다면 모두로부터 잊혀져 모래 속에 파묻힌 뼈 무더기 중 하나가 될 것 이였다. 하지만 어차피 다음날의 일출을 보지 못한 채 죽을 지언데 목숨을 아껴서 무엇에 쓰겠는가?
 
방향도 정하지 않고 사막 속으로 달려 나가며,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고래고래 외쳤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시어, 저는 잠룡께서 가진 그 어느 보물보다도 귀중한,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 무엇인지 압니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시어!”
 
누가 본다면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드디어 미쳤구나 하겠지만, 그녀는 눈꼽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각오로 나섰는데 그까짓 평판 따위를 신경 쓸 여를이 있을리가 있는가.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외치고 또 외쳤고, 그녀가 탄 낙타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하늘 높이 차오른 태양은 차올랐으니 다시 저물기 시작했고, 저물기 시작하니 어느덧 지평선 너머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를 하며 모래장미의 붉은 머리카락을 타오르는듯한 노을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다급해졌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 그녀의 외침을 못 들은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외침을 그저 헛소리라 비웃은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정말로 그저 헛소문일 뿐 이였던 것일까. 그녀의 마음은 초조함에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태양이 저물기까지 약간의 시간만이 남았으니 당연한 일이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사막도시의 모래장미의 낙타가 갑자기 불안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낙타는 갑자기 무엇인가에 겁먹은 것처럼 낮게 깔린 울음소리를 냈고,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낙타를 달래기 위해 열심히 어루만져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모래바닥 위에 내팽개친채 멀리 지평선 너머의 사막도시로 도망쳤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모래바닥 위에 내팽개쳐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범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모래 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굉음과 함께 모래장미 앞의 모래바닥이 폭발하듯 솟구치며 그 아래로부터 거대한 잠룡이 한명 솟구쳐 올라왔다. 가장 기다란 상단의 끝과 끝보다도 더 길며, 가장 거대한 궁전보다도 거대하며, 가장 위대한 사내 일천 명보다도 더 위대한 모습의, 구릿빛 비늘로 뒤덮여 반짝이는 잠룡. 동방 대사막의 잠룡과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 이였다.
 
모래를 뚫고 솟구쳐 올라온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동방 대사막 동쪽에 자리 잡은 대산맥 두개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 굉음을 내며 내려앉아, 가장 매서운 맹수의 울음소리보다도 야생스럽고, 가장 현명한 사내의 강론보다도 지혜로우며, 가장 위대한 사내의 호통보다도 압도적인 동시에, 가장 감미로운 음유시인의 목소리보다도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땅의 위대한 도시로부터 온 사람아, 나는 사람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 기백 명을 합친 것보다 더 오래 살며 서방바다 너머로도 가보고 동방의 제국 너머로도 가보며 남동부 제국의 너머로까지 가보면서 이 땅의 진귀한 보물이란 보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모았노라. 그런데 이 땅의 모래알갱이만큼이나 무수한 도시들 중 겨우 하나에서만 살아본 네가 어찌 내가 가진 어떠한 보물보다도 귀중한 보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냐?"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정말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던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 나타나자 당황했지만, 최선을 다해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답했다.
 
"동방 대사막의 위대한 잠룡이시어, 본디 삶이란 다양하고도 깊이 있기 그지없어, 본디 백년을 산 자도 깨닫지 못한 것을 갓 태어난 갓난아기가 우연찮게 발견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세상의 모래알갱이를 한곳에 모두 모은 다음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그 안에 숨긴다면, 세상의 태초부터 종말까지 그 모래사막을 뒤집어엎어도 그 보물을 찾지 못하는 자가 있는 반면, 가벼운 마음으로 나들이를 하다가 그 귀한 보물이 발에 부딪혀 우연찮게 찾는 자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연찮게 찾았다해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 귀하지 않다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가 찾은 이 귀한 보물이 어울리실 위대하신 잠룡께 이 보물을 바치고자하니, 저는 보물의 대가로 그저 겸손히 한가지만을 요구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보물을 위해서라면 가지고 있는 보물 모두를 바칠 수도 있는 잠룡이다. 원하는 대가를 말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거짓으로 고해서 감히 나를 속이려 든 것이라면 네년의 구족의 구족의 구족의 구족까지 그 대가를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으로서 치를 것이다. 원하는 대가가 무엇이더냐?"
 
분명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 원한다면 말한대로 행할 수 있을테니, 참으로 두려운 말 이였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순간 괜한 일을 한 것이 아닌가하는 후회감이 들었지만, 동방 대사막의 잠룡 너머 보이는 태양이 바로 그 순간에도 저물어가고 있었으니 투정부릴 여유는 전혀 없었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원하는 대가를 말했다.
 
"하늘의 태양이 저물지 않도록 해주십시요."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순간 그의 위대하고도 정교하기 짝이 없는 귀가 오작동을 일으킨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리 만무했다. 그래서 잠룡은 온 사막이 울리도록 웃었다. 잠룡의 웃음소리는 서방바다 너머의 대륙부터 동방의 제국 너머 대군도 까지 우레 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잠룡 주위의 모래는 파도처럼 요동치며 사막도시의 모래장미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사정없이 덮쳤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모래파도에 파묻힌 것을 본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간단한 의지만으로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를 끄집어냈고, 그 충격에 만신창이가 된 모래장미의 몸과 옷을 말끔히 씻어냈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 웃은 것만으로도 주변의 지형이 모조리 뒤바뀐 것을 본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잠룡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웃은 잠룡은 잠룡의 힘에 완전히 압도되어 할 말을 잃어버린 모래장미에게 말했다.
 
"덕분에 근 오백년간 웃지 못했던 내가 오랜만에 속이 시원해지도록 웃을 수 있었다. 네년은 태양이 저물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알고 있느냐?"
 
"그러면 제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이 예상하지 못한 대답 이였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어떻게 서방바다의 주술사가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저주를 걸었고, 나흘째의 일몰을 보게 되면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죽을 것인지를 얘기했다. 또한 모래장미는 덧붙히길,
 
"제가 알려드리고자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은 오로지 제가 말하는대로 하셔야만 발견하고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제가 그 전에 죽는다면 동방 대사막의 잠룡께서도 영원히 그 귀한 보물이 무엇인지를 모르시게 될 것입니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말을 끝나자 불안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듯한, 그 흑진주 같은 두 눈으로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마치 사자 앞의 개미가 된 것 처럼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잠룡의 위압감에 마치 온 세계의 시간이 정지한듯 싶었으며,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과 뚝뚝거리며 흘러내리는 식은땀만 느껴졌다. 하지만 영원할듯 싶은 것도 결코 영원하지는 않는 법, 잠룡이 입을 열자 그 불안한 침묵은 깨져나갔다.
 
"좋다. 네년이 원하는대로 네년이 원하는만큼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자 꾸준히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춰가던 태양이 멈춰섰고, 서쪽에서 저물던 태양이 대신 서쪽에서 떠올라 동쪽으로 넘어가며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시원한 초저녁무렵의 위치에 멈춰섰다.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정말로 태양까지 원하는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였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그 모습을보자 긴장감이 풀려 자기도 모르게 주저앉을뻔 했지만, 잠룡이 의지하자 몸에 힘이 되돌아와서 계속 서서 그 진귀하고도 기묘한 광경을 계속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문득 앞으로 살아서는 다시 못할 것이라 생각한 광경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혹시, 제가 원하는대로 제가 원하는만큼 이루어질 수 있다면, 동쪽에서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일출 역시 이루어질 수 있나요?"
 
동방 대사막의 잠룡은 말로 답하는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저녁무렵에 머물러있던 태양은 동쪽으로 저물어 모습을 감춘 다음, 서서히 동쪽에서부터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스름한 이른 아침의 어둠에 잠겨있던 동방 대사막의 모래바다가 밝혀졌고, 어느 황금보다도 아름다운 황금빛으로 불타올랐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살아서는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광경, 어느 보물보다도 아름다운 광경 이였다. 사막도시의 모래장미는 안에서 무엇인가 북받혀오르는 것을 느꼈다. 잠룡 역시 그것을 보며 덧붙혔다.
 
"네년이 알고있다는 그 귀중한 보물이 사막의 일출이 아니길 바라마."
 
물론, 사막도시의 모래장미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은 사막의 일출이 결코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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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 나온 시는 퍼시 셸리라는 영국 시인의 ‘오지맨디어스(발음기호는 /ˌɒziˈmændiəs/)라는 소네트입니다. 오지맨디어스 보다는 오지만디우스가 저는 더 좋아서 걍 그렇게 함. 저 한글번역판은 엔하위키에 적혀있던 것이 제가 보기에는 원문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방식으로 번역됬다 생각해서 제가 개인적으로 좀 다듬은걸 올려봤습니다. 원문과 이전번역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I met a traveller from an antique land
Who said: "Two vast and trunkless legs of stone
Stand in the desert. Near them, on the sand,
Half sunk, a shattered visage lies, whose frown,
And wrinkled lip, and sneer of cold command,
Tell that its sculptor well those passions read
Which yet survive, stamped on these lifeless things,
The hand that mocked them and the heart that fed:
And on the pedestal these words appear:
'My name is Ozymandias, king of kings: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Nothing beside remains. Round the decay
Of that colossal wreck, boundless and bare
The lone and level sands stretch far away."

옛 땅에서 온 여행자를 만났네.
그가 가로되, '거대한 두 다리 석상이 몸통없이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소. 그 곁에는 모래판에 
반쯤 묻힌 깨진 두상이 누워있었는데, 그 표정이 찌푸려져 있고,
주름진 입술엔 냉정한 명령자의 냉소가 감돌고 있었기에,
조각가가 그 지배자의 열정을 잘 읽었음을 보여주는 바, 
그리하여 그 열정이 그 주인에 따르던 손과 뛰던 심장을 넘어서
생명 없는 돌 위에 각인되어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았소이다.
그리고 발판에는 이런 말들이 있더이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
나의 업적을 보라, 뉘 강대하다는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아무 것도 주변에 남아있지 않았소. 뭉툭하게 삭아버리고
그 엄청난 폐허가 된 둘레 주위로, 끝이 없고 황량한
외로운 첩첩의 모래 벌판이 멀리까지 뻗어 있었소.'


중간에 나오는 쑤크 알-마디나라는 곳은 알레포에 진짜로 있는 장터인데 이번에 시리아 내전땜시 치고받고 싸우면서 엄청 망가지고 부서졌다네요. 아쉽 ㄷ. 


어쩌다보니 길어져서 2개로 나눴는데 다음화를 언제 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