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7 17:49
넓은 강당. 가장 앞쪽에 교수가 있고, 뒤에 앉은 사람들도 교수를 잘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배치 된 의자들이 뒤로 갈 수록 조금씩 높은 곳에 놓여지는 그런 평범한 강당. 갈색 스웨터와 카키색 바지를 입은 40대 교수는 그의 강당을 한번 둘러봤다. 그리 대단치 않은 대학교에서 양자역학에 진지한 흥미를 느끼는 학생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강당 자체에는 대여섯의 학생들만이 있었고 그들조차 지루하고 피곤한지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교수는 문득 이대로 강의를 이어가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달았다. 듣는 사람이 없건만 계속 말하는 것이야말로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가 아니겠는가. 교수는 펼쳐서 손에 쥐고 있던 서적을 덮은 후 강단에 놓여진 탁자에 책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잠이 깼는지 교수에게 다시금 시선이 모여졌다. 교수는 말했다.

"오늘은 강당 앞 커피자판기가 고장이라도 났나 보군."

피곤함을 살짝 깨워주는 기분 좋은 웃음이 강당을 잠시 휩쓸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더 이상 강의를 이어가도 들을 사람이 없으니, 대신 재밌는 이야기나 한번 해보겠네. 이런, 내 말에 뜨끔한 표정을 짓는 사람조차 없을 줄은 몰랐는데. 여하튼, 얘기를 한번 시작해보지.

여러분은 평행우주가 어떤 것인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일세. 지금까지 내 강의에 나와서 심지어 그것조차 배우지 못했다면 나는 차라리 멍게를 가르치는 것에서 더 보람을 느낄 것일세. 멍게가 바위에 정착하고나면 스스로의 뇌를 맛깔나게 먹어치우겠지만, 이미 먹어치운 사람들보다는 더 낫지 않겠나?

(짧은 웃음.)

그런데, 숫자와 공식들을 가지고 놀면서 난립하는 최신 학설에 촉수를 곤두세우며 보내다보면, 가끔 우리가 다루는 개념들의 경이와 신비를 잊게 될 때가 있어. 우주의 신비가 어쩌다보니 한낱 인간의 도구가 되어버리는거지. 좋은 학점을 받는 도구, 학계로부터 인정을 받는 도구,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도구, 명예와 명성을 얻는 도구. 우주의 신비가 너무도 경이로워서 그것을 연구하다보니 인정을 받는게 아니라, 인정을 받기 위해 우주의 신비를 한낱 도구로서 휘두르며 생사결단을 낼듯 달려든다니, 이건 주종관계가 뒤바뀐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평행우주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 교수가 정리한 아홉가지 평행우주중 하나인 누벼이은 다중우주(Quilted Multiverse)를 한번 보자. 그린 교수는 우주의 입자가 모두 정립된다면 10의 10승의 122승 미터일 것이라 계산했다. 천문학적인 숫자이지만, 동시에 일단 숫자는 숫자이니 이론적으로는 이 거리를 모두다 이동한다면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우주의 끝을 넘어갈시 과연 어떤 것이 나타날까? 시공의 개념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법칙을 따르는 미지의 무언가? 누벼이은 다중우주에서는 우리 우주의 끝을 지나가면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 우주의 너머에는 다른 우주가, 그 다른 우주의 너머에는 또 다른 우주가, 무한한 공간만큼 무한히 이어져 무한한 숫자의 우주가 있다는 것이지.

이것은 결국 무한한 공간의 무한한 우주에서 무한한 다양성의 무한한 사건들이 무한한 숫자만큼 일어난다는 것일세. 어떤 일이던 상상할 수 있다면 어떤 우주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그 숫자조차 무한한 것이지. 지금 당장 슈퍼맨이 강당 지붕을 뚫고 강당 한가운대에 추락할 수 있는 것이야."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 세상이 무너져내리는듯한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강당 천장을 뚫고 슈퍼맨이 추락해서 강당 한가운대에 처박혔다. 학생들이 앉아있던 기다란 의자들은 그 충격에 부서지고 깨지며 허공을 비산해 사방에 처박혔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 이계에서 넘어온 마법사이기에 시공을 격리하는 마법방패를 만들어서 그 충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도 있는 것이지."

역시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생들은 시퍼런 안광을 사방에 흩뿌리며 암흑 에너지를 집결시켜 시공을 격리하는 마법방패를 만들어내 갑작스러운 충격파로부터 스스로를 지켰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겠고."

교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당의 중앙에는 지름 5m 내외의 크레이터가 뚫려 사방에 콘크리트 가루가 뿌옇게 비산했지만, 그런 을씨년스러운 풍경 와중에도 학생들과 교수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교수는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이제 레드헐크가 강당 천장에 뚫린 구멍 가장자리 나타나겠지. 학생들은 그것을 보고 골치아픈 표정을 짓을지도 몰라."

"젠장할, 저 악마같은 짐승이 이 구석진 세상의 끝까지 기어코 우리를 추적해 찾아냈구나!"

"하지만 정말 순전한 우연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번개가 하필 오늘 강당의 천장에 있는 레드헐크를 강타할 수도 있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너무나도 밝고 너무나도 강렬해 세상만물이 모조리 새하얗게 변해버리는듯한 무시무시한 위력의 번개가 레드헐크를 내려쳤다. 레드헐크는 그 천문학적인 에너지의 흐름에 한순간도 저항하지 못하며 시꺼멓게 타 잿더미로 변했다.

"그리고 정말 순전한 우연으로 단 0.0001초의 시간차도 없이 은으로 된 전선이 날아와 레드헐크의 발을 통해 강당천장으로 흘러나온 전류를 조금도 남김없이 모조리 흡수해 머나먼 곳으로 전송함으로서 강당에 있는 나머지는 감전의 위험을 무사히 이겨낼 수도 있는 것이지."

학생들은 그 무시무시한 에너지의 극히 일부분인 섬광을 바라본 것 만으로도 눈이 먼듯 고통스러워했지만, 강당과 강당 주위의 모든 것을 씻은듯이 지워버릴 수도 있었을만한 에너지가 레드헐크를 후려쳤는데도 운좋게 은으로 된 전선이 모든 전력을 다른 곳으로 전송해 보내서 레드헐크만이 죽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을 짓었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영화일 수도 있어."

라고 영화관 스크린의 교수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소설일 수도 있지."

라고 작가는 타자를 쳤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노래일지도 몰라."

라고 노란 장발의 가수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만화일 수도 있고 말이야."

라고 만화가가 그렸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망상일 수도 있어."

'...이지 않을까?'

라고 누군가가 망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끝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