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4 19:23

어느 평범한 하루. 머나먼 곳에서부터 온 미지의 감마선이 지구를 휩쓸었다. 인류중 그 누구도 그것을 관측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현상으로서만 존재하며 인류를 지워냈다. 지워내다.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였다. 인류는 말 그대로 감마선에 의해 지구로부터 지워져나갔다.


지구는 이제 죽었다. 고도로 망가진 생태계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망가트린 인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또한 감마선에 의해 대부분이 지워져나가졌다. 지구는 파괴 된 그들을 유지시켜주던 인류와 함께 조용히 세계로부터 사라졌다.


이제 죽은 지구에 남은 것은 죽은 기계들만이 유일했다. 심각하게 파손 된 그들중 대부분은 다시 복구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 파손정도가 덜한 기계들은 내부에 배치 된 무한동력장치를 통해 느리게 스스로를 복구했고, 5천여년 후 기계들중 대부분은 자가복구를 마칠 수 있었다. 그 기계들은 인류의 편의를 위해 간단한 AI가 프로그래밍 된 물건들이였다. 


도시들은 조금이나마 생명을 되찾았다. 은행원 역할을 맡은 기계들은 폭삭 무너져내린 은행의 잔해 위에서 그들의 역할을 완수하게 해줄 손님들을 기다렸다. 경찰 역할을 맡은 기계들은 아무도 남지 않은 음울한 거리를 끝없이 질주하고 또 질주하며 있을리 없는 범죄자를 찾아 도시를 조용히 순찰했다. 그런 경찰 역할을 맡은 기계들을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은 붉은색 카메라로 바라보며 환경미화원 기계들은 그들이 처리할 수 없는 쓰레기인 콘크리트 덩어리에 막혀 그것을 끊임없이 빗질하고 또 빗질했다. 빗자루가 먼저 닳아 없어질지 아니면 콘크리트 덩어리가 먼저 닳아 없어질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죽음의 놀이였다. 위대한 문명의 잔해들이 모여 수억년이고 수십억년이고 끊임없이 반복할 침묵의 놀이. 그들은 다양한 소리로 진혼곡을 부르며 언젠가 손님이 그들에게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의 행위로부터 도움을 얻을 손님들. 하지만 손님들은 당연하게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오로지 그들 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들만의 놀이를 끊임없이 반복할 기계들 뿐이였다. 


그것은 영원한 역할분담놀이였다.